순천김씨(順天金氏), 순천김씨 시조, 김총, 순천김씨 유래, 순천김씨 조상인물
순천김씨시조 및 순천김씨유래(본관)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 시대에는 함평(함平)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서기 996년(고려 성종 15)에 승주(昇州)로 불렀다가 1310년(충선왕 2) 순천(順天)으로 개칭하였다.
신라 왕실(新羅王室)의 후예(後裔)인 순천김씨(順天金氏)는 경문왕(景文王 : 신라 제48대 왕, 재위기간 : 861~875)의 아들로 태봉국(泰封國)을 세운 궁예(弓裔)의 손자(孫子) 김총(金摠)이 시조(始祖)이다.
문헌(文獻)에 의하면 그가 신라에서 인가 별감(引駕別監)을 지내고 평양(平陽 : 순천의 옛 지명)군(君)에 봉해졌으므로,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순천(順天)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가문의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낸 윤인(允仁)의 손자 유정(惟精)이 통정대부(通政大夫)로 정주 목사(定州牧使)를 역임하고, 충순보조익위공신(忠純輔祚翊衛功臣)으로 여산군(麗山君)에 봉해졌다.
그의 아들 승주(承霔)는 초명(初名)이 을보(乙寶)였으며, 1380년(우왕 6) 군기시소윤(軍器寺少尹)을 지내고, 창왕(昌王) 때 풍주(豊州)의 수령(守令)으로 나가 왜구(倭寇) 격퇴에 공(功)을 세워 조선(朝鮮)이 개국(開國) 한 후 정종(定宗) 때 추충익대좌명공신(推忠翊戴佐命功臣)에 올랐다.
이어 공조 판서(工曹判書)와 평양부윤(平壤府尹) 등을 지냈으며, 태종(太宗) 때 병조 판서(兵曹判書)에 이르러 평양부원군(平壤府院君)에 봉해지고, 승주(承霔)란 이름을 하사(下賜)받았다.
특히 조선조(朝鮮朝)에 와서 가문(家門)을 빛낸 인물(人物)로는 명신(名臣) 종서(宗瑞)를 들 수 있다.
그는 1390년(공양왕 2) 지평(持平) 태영(台泳)의 손자(孫子)로 출생하여 16세 문과(文科)에 급제, 세종(世宗)이 즉위하자 사간원 우정언(司諫院右正言)을 거쳐 여러 관직을 지낸 후 1433년(세종 15) 함길도 도관찰사(咸吉道都觀察使)로 야인(野人)들의 변경침입을 격퇴했고, 육진(六鎭:동북방면 여진족의 침입에 대비하여 두만강 하류지역에 설치한 여섯 진)을 설치하여 두만강(豆滿江)을 경계로 국경선을 확정하며 함길도 병마절제사를 겸직, 야인의 정세를 탐지하여 그 비변책(備邊策)을 건의했고, 형조(刑曹)와 예조(禮曹)의 판서(判書)를 지낸 후 1446년(세종 28) 우참찬(右參贊)에 올랐다.
당시 권 제(權 踶) 등이 수교(讎校)한「고려사(高麗史)」가 공정하지 못하여 개찬(改撰)하게 되자 지춘추관사(知春秋館事)로 그 총책을 맡아 1451년(문종 1) 간행했으며, 좌찬성(左贊成)으로 평안도 도체찰사(平安道都體察使)를 겸직한 후 우의정(右議政)에 올라「세종실록(世宗實錄)」의 편찬을 감수했다.
특히 그는 지용(智勇)을 겸비한 명신으로 문종(文宗)이 승하(昇遐)하며 어린 단종(端宗)의 보필을 부탁하자 좌의정(左議政)으로서 영의정(領議政) 황보인(皇甫仁) 우의정(右議政) 정 분(鄭 笨) 등과 함께 어린 왕을 보필하여 <대호(大虎)>라는 별명까지 붙었다.
1453년(단종 1) 왕위(王位)를 노리던 수양대군(首陽大君:세조)에 의해 두 아들 승규(承珪)․승벽(承璧), 손자(孫子) 만동(萬同)․조동(祖同) 등과 함께 격살되고 그의 아우 종한(宗漢)도 화(禍)를 입었으며, 승규(承珪)의 막내 아들만이 어머니를 업고 도망감으로써 간신히 일가(一家)의 절손(絶孫)됨을 면하게 되었다.
작은 체구에 뛰어난 지략으로 많은 업적을 남긴 그는 오랑캐를 막기 위하여 함경도 8진(八鎭)의 지세(地勢)와 공수(攻守) 방법을 적은「제승방략(制勝方略)」이란 저서(著書)를 남겼으며, 호기가(豪氣歌)를 포함하여 시조(時調) 두 수가 전한다.
이러한 충절(忠節)의 전통(傳統)을 이어 가문을 더욱 중흥시킨 인물인 여물(汝岉)은 선조(宣祖) 때 알성문과(謁聖文科)에 장원으로 급제하여 낭관(郎官)과 충주 도사(忠州都事)를 거쳐 의주 목사(義州牧使)로 나갔다가 서인(西人)인 정 철(鄭 澈)의 일당으로 몰려 파직되었으나,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왕(王)의 특명으로 삼도 도순변사(三道都巡邊使) 신 입(申 砬) 장군과 함께 충주(忠州) 방어에 나가 충주 달천(撻川)을 등지고 배수진(背水陣)을 쳤으나 북상하는 적군을 막지 못하여 탄금대(彈琴臺)에서 신 입(申 砬)과 함께 강물에 투신 자결하였다.
한편 여물(汝岉)의 아들 유(瑬)는 당대에 이름난 학자(學者) 송익필(宋翼弼)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우고, 1596년(선조 29) 정시문과(庭試文科)에 급제하여 승문원(承文院)의 벼슬을 거쳐 광해군(光海君) 때 강계 부사(江界府使)를 지냈으며, 인조반정(仁祖反正)의 공신(功臣)으로 승평부원군(昇平府院君)에 봉해지고 병조 판서(兵曹判書)와 대제학(大提學 : 홍문관․예문관의 정2품 으뜸 벼슬)을 거쳐 우찬성(右贊成)․우의정(右議政)․좌의정(左議政)을 역임한 후 1636년(인조 14) 영의정(領議政)에 올라 영국일등공신(寧國一等功臣)으로 순천부원군(順天府院君)에 봉해졌다.
특히 그는 수차에 걸쳐 영의정(寧議政)을 역임하며 정치적인 공적을 쌓았고, 시문(詩文)과 글씨에 뛰어나 명성을 날렸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인조(仁祖) 때 부제학(副提學)을 지낸 흥국(興國)과 한성부 판윤(漢城府判尹) 경징(慶徵)이 유명했으며, 진표(震標)는 별시문과(別試文科)에 장원하고 청풍 군수(淸風郡守)와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하여 부사(府使) 광우(光宇), 감찰(監察) 성흠(聖欽)과 함께 명문(名門)의 전통(傳統)을 이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순천김씨는 전국에 총 62,916명이 살고 있는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순천김씨조상인물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5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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순천김씨시조 및 순천김씨유래(본관) 순천(順天)은 전라남도(全羅南道) 남동쪽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 시대에는 함평(함平)이었으나 신라(新羅) 때 승평(昇平)으로 고쳤으며, 서기 996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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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 한국성씨총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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