김녕김씨(金寧金氏)시조, 김시흥(金時興), 김녕김씨 조상인물
김녕김씨의 연원(金寧金氏의 淵源)
김녕(金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文化) 중심지로 발전하여 오다가 서기 532년 신라(新羅)법흥왕 (法興王)19년에 병합되어 금관군(金官郡)이 되었다.
그후 문무왕(文武王)이 금관소경(金官小京)을 두었으나 경덕왕(景德王)이 김해소경(金海小京)으로 고쳤고, 고려초기(高麗初期)인 940년 태조(太祖)23년에 는 김해부(金海府)로 고쳐 임해(臨海) 금주(金州),등으로 불리웠으며, 1270년원종(元宗)11년 방어사(防禦使) 김 원(金咺)이 인접지역인 밀성(密城)의 난(亂)을 평정(平定)하여 김녕도호부(金寧都護府)로 승격되었다가 금주목(金州牧)․분성(盆城)등으로 호칭하다 고려 1310년 충선왕 (忠宣王)2년 김해도호부(金海都護府)로 개칭되어 오늘에 이르렀다..
김녕김씨시조(金寧金氏 始祖) 김시흥(金時興)은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의 7세손으로 의성(義城)에서 출생하여 고려 인종(仁宗) 때 묘청(妙淸)의 난을 평정(平定)하여 금주군(金州君)에 봉해졌으며, 명종(明宗) 때에는 조위총(趙位寵)의 난을 토평하는 데 공(功)을 세워 식읍(食邑)을 하사(下賜) 받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이 관향(貫鄕)을 김녕(金寧)으로 하여 세계(世系)를 이어오다가 고려말에 지명(地名)이 김해(金海)로 개칭되어 김해로 칭관(稱貫)하게 되었다. 그러나 수로왕(首露王)계통의 김해 김씨(金海金氏)와 혼돈되므로 김해 김씨를 선김(先金)으로,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후김(後金)으로 칭 하다가 1884년(고종21년)김녕 후손들이 탄원(歎願)하여 예조(禮曹)의 비준(批准)을 받어 왕명(王命) 으로 관향(貫鄕)을 김녕(金寧)으로 확정(確定)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고려말기부터 충절(忠節)로 가통(加統)을 이은 김녕 김씨(金寧金氏)는 시조(始祖) 시흥(時興)의 증손(曾孫) 중원(重源)이 고려조(高麗朝)에서 안렴사(按廉使)를 거쳐 형부시랑(刑部侍郞)을 지내고 이부 상서(吏部尙書)에 증직(贈職)되었다. 특히 그는 고려가 망하자 개탄하여 단식을 하다가 순절(殉節)하였다. 공양왕(恭讓王) 때 판도판서(版圖判書)를 지낸 광저(光儲) (중원의 손자)는 무록산(武에 들어가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절의(節義)를 지켰는데, 태종(太宗)이 이조판서(吏曹判書)의 벼슬을 내려 그를 회유하려 했으나 끝내 거절하였다
한편 광저(光儲)의 아들 순(順)도 고려때 호조판서(戶曹判書)를 역임하였으나 조선(朝鮮)이 개국(開國)되어 벼슬에서 물러나 호(號)를 퇴휴당(退休堂)이라 하고 충북(忠北) 옥천(沃川) 백지리(白池里)에 정자(亭子)를 짓고 망국의 한을 달랬으며, 분성군(盆城君) 정신(挺申)의 아들 질(秩)은 태조(太祖)가 등극전에 정의(情誼)로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책록하고 예조판서(禮曹判書)에 임명되었으나 불응(不應)하고 아산(牙山) 도고산(道高山)에 은거(隱居)한 후 두 임금을 섬길 수 없다 하여 자호(自號)를 송암(松菴)이라 하였다.
이렇게 충절의 가맥(家脈)을 이어온 김녕 김씨는 이조 판서(吏曹判書) 관(觀 ; 시조의 8세손)의 아들 문기(文起)가 더욱 빛냈다.
그는 1399년(정종1년) 2월 16일 충북(忠北) 옥천군(沃川郡) 이원면(伊院面) 백지리(白池里)에서 출생하여 세종(世宗) 때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하고 예문관 검열(藝文館檢閱)에 임명되어 「태종실록(太宗實錄)」을 편찬했으며, 계유정난(癸酉靖難) 때 이조판서(吏曹判書)로 내외종간(內外從間)인 박팽년(朴彭年) 등과 더불어 단종(端宗)의 복위를 도모했다가 1456년(세조1년) 6월 8일 사육신(死六臣)과 함께 순절했다.
거창(居昌)과 양지 현감(陽知縣監)을 거쳐 영월 군수(寧越郡守)를 역임한 현석(玄錫)도 아버지인 문기(文起)를 따라 순절하였고, 문기의 손자 충주(忠柱)와 증손 경남(景南) 현손(玄孫) 약전(約前) 등이 모두 충효(忠孝)로 가문(家門)을 빛내어 <5세충효(五世忠孝)>의 정문(旌閭)이 세워졌다.
한편 준(遵 : 시조의 10세손)은 천문(天文)․지리(地理)와 실학(實學)에 능통한 인물로 단종(端宗)이 죽임을 당하자 3년간 복상을 한 후 벼슬을 버리고 전남(全南) 고흥(高興)으로 내려가 학문(學問)에만 전념했다.
호국(護國)의 인물을 살펴보면 이진왜란(壬辰倭亂)때 판서(判書) 복룡(福龍)의 아들 부호군(副護軍)으로 출전(出戰)한 응수(應壽), 파진군(破陣軍)응부(應富),응령(應令) 3형제와 무과(武科)에 급제(及第)한 응수(應壽)의 장남(長男) 계현(繼賢)등 가족이 합심(合心) 창의(倡義)하여 전공을 세워 많은 가족들이 호성공신(扈聖功臣)에 올라 공신(功臣家門)으로 빚을 냈으며, 담양 부사(潭陽府使) 언공(彦恭)은 권 율(權 慄)의 영천(永川) 전투와 이순신(李舜臣) 장군의 노량대첩(露梁大捷)에서 중추적인 역할을 하여 명성을 떨쳤다.
또한 노모(老母)를 등에 업고 팔공산(八公山) 전투에서 공(功)을 세운 유부(有富)와 그의 아들 기남(起南)․난생(蘭生) 형제는 병자호란(丙子胡亂)에 순절하고 준걸(俊傑),( 선조 때의 공신), 득성(得誠)․영길(永吉), 선전관으로 임진왜란 때 순절) 부자(父子)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진행(鎭行)은 효행(孝行)으로 정표(旌表)를 받아 충(忠)과 효(孝)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名門) 김녕 김씨(金寧金氏)를 더욱 빛냈다.
인 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김녕김씨(金寧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577,793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인물-김녕김씨조상인물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0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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김녕김씨의 연원(金寧金氏의 淵源) 김녕(金寧)은 경상남도(慶尙南道) 김해(金海)의 옛 지명(地名)으로 낙동강(洛東江) 하구 남서쪽에 위치하여 일찍부터 가락국(駕洛國)의 문화(文化) 중심지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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