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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4.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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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 김알지(金閼智)

 

경주김씨의 연원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新羅) 56대(代) 경순대왕(敬順大王)이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옛 수도(首都)인 금성(金城)을 경주(慶州)라 개칭(改稱)하였다. 그런데 경주김씨(慶州金氏)의 기원(起源)은 대보공(大輔公) 김알지(金閼智)를 시조(始祖)로 한다. 김알지(金閼智)는 서기(西紀)65년 신라(新羅) 석탈해왕(昔脫解王) 9년 금성(金城) 서쪽 시림(始林)의 나무가지에 걸려있던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해서 성(姓)을 김(金)으로 하였다.

대보공(大輔公)의 칠세손(七世孫) 미추(味鄒)가 석조분왕(昔助賁王)의 여(女) 광명부인(光明夫人)을 취(娶)하여 사위가 되었는데 석첨해왕(昔沾解王)이 후사(後嗣)가 없이 승하(昇遐)하시니, 석첨해왕(昔沾解王)의 뒤를 이어 신라(新羅) 13대 왕으로 오르면서부터 신라(新羅) 왕성(王姓)이 되었다.

경주김씨(慶州金氏)는 신라(新羅) 56왕중에서 38왕(재위기간587년)을 내어 삼한(三韓)의 대표적(代表的)인 성씨(姓氏)를 이룰 수 있었다. 신라(新羅) 마지막 경순대왕(敬順大王)은 935년 군신회의(君臣會議)에서 손국(遜國)에 대한 찬반(贊反)이 엇갈리며 태자(太子) 일(鎰)의 불가론(不可論)이 제기(提起)되기도 했지만 결과(結果)는 현실적(現實的)인 자구(自救)의 방법(方法)을 택(擇)하였다.

태자(太子)는 손국후(遜國後) 맹장군(孟將軍), 죽방부인(竹房夫人) 박씨(朴氏), 덕주공주(德周公主), 등 일만여명(一萬餘名)은 신라(新羅) 중흥운동(中興運動)의 장차(將次) 거점(據點)이 될 설악산(雪嶽山)으로 들어갔다.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아들이 아홉인데 첫째부터 넷째까지는 모두 본관(本貫)을 경주(慶州)로 하였다. 태자(太子) 일(鎰)의 둘째아들 순웅(順雄)은 대장군공파(大將軍公派)로 굉(鍠)의 둘째 우발(雨發)은 안노백파(安老伯派), 셋째 명종(鳴鐘)은 영분공파(永芬公派), 넷째 은열(殷說)은 대안군파(大安君派)로 각각(各各) 경주김씨(慶州金氏) 대파(大派)를 이룩하였다.

본관지(本貫地) 연혁(沿革)

신라(新羅)의 옛 수도(首都)인 왕경(王京)을 대경(大京) 또는 금성(金城)이라 불렀다. 서나벌(徐那伐), 즉 서라벌(徐羅伐)이라 했는데 이것이 변(變)하여 오늘날 수도(首都)를 서울로 부르게된 연유(緣由)이다. 935년 고려(高麗)에 손국(遜國)하자 마지막 남은 신라(新羅)땅의 이름을 경주(慶州)로 고치고 경순대왕(敬順大王) 부(傅)를 경주사심관(慶州事審官)으로 삼았다.

940年 고려태조(高麗太祖) 23년에 안동(安東) 대도호부(大都護府), 987년 성종(成宗) 6년 동경유수부(東京留守府)로 고쳐 영동도(嶺東道)에 예속(隸屬)시켰고, 현종(顯宗) 때에는 경주방어사(慶州防禦使)로 하였으며 신라복귀반란(新羅復歸叛亂)이 일어나자 주(州), 부(府), 군(郡), 현(縣)을 빼았아 안동(安東), 상주(尙州)에 나누어 예속(隸屬)시키기도 하였다. 조선(朝鮮) 태종(太宗)때 경주(慶州)라는 옛 이름을 다시 썼다.

씨족(氏族)의 개요(槪要)

우리나라의 김씨(金氏)는 크게 가락국(駕洛國)의 수로왕계(首露王系)의 김씨(金氏)를 제외(除外)하고는 모두 김알지(金閼智)의 후손(後孫)이다. 신라(新羅)에서 김씨왕계(金氏王系)가 내려오면서 김주원(金周元)의 후손(後孫)인 강능김씨(江陵金氏)처럼 도중(途中)에 인물(人物)을 분관조(分貫祖)로 한 성씨(姓氏)도 있으나, 대개(大槪)는 경순대왕(敬順大王)의 아들에서부터 세계(世系)가 내려오고 있다.

그러나 병란(兵亂)과 사화(士禍), 외적(外賊)의 침입(侵入)등의 수난(受難)을 겪는 동안 문헌(文獻)과 유적(遺蹟), 유물(遺物)이 망실(亡失) 훼손(毁損)되어 분명(分明)한 계대(系代)를 찾는 일에 주력(注力)하였으나 1784년 계림군후손(雞林君後孫) 김사목(金思穆)과 안동인(安東人) 김익노(金翼老)등이 경순대왕(敬順大王)의 넷째아들 대안군 은열(大安君 殷說)의 묘비문(墓碑文)을 발견(發見)함으로서 왕자(王子)들의 서차(序次)를 확인(確認)하여 이후(以後) 문헌비고(文獻備考)등 각종(各種) 간행물(刊行物)에 기록(記錄)되었다

김알지(金閼智) 서기(西紀)65~?

봉위(封位): 대보공(大輔公) 서기전(西紀前) 57년3월 일 육부촌장(六部村長)인 이알평(李謁平), 최소벌도리(崔蘇伐都利), 손구례마(孫俱禮馬), 정지백호(鄭智伯虎), 배지타(裵祗陀), 설호진(薛虎珍), 등이 모여 13세 된 박혁거세(朴赫居世)를 추대(推戴)하고 서라벌(徐羅伐)을 다스리기 시작했으며 백선장(白善長), 고령시(高靈是), 조공흠(趙公欽), 이두창(李頭昌), 임의신(任儀信), 지충강(池忠江), 김관령(金寬齡), 조익관(趙益寬), 양지백(梁之伯), 조대정(趙大正), 추자평(秋子平), 정선엽(丁善燁), 임동방(林彤芳), 강이태(康二太), 정지석(鄭之碩), 홍식(洪息), 양선진(梁善秦), 신초시(申初是), 한영구(韓寧龜), 이형익(李衡翊), 등이 차례로 와서 신라건국(新羅建國)을 도운바 있다.

김알지공(金閼智公)은 서기65년(석탈해왕(昔脫解王9년) 금성서편(金城西便) 시림(始林)에서 강임(降臨)하셨으며 탈해왕(脫解王)이 양육(養育)하였다. 금궤(金櫃)에서 태어났다 하여 성(姓)을 김(金)이라 하였고 경주김씨(慶州金氏) 시조(始祖) 대보공김알지(大輔公金閼智)이다.

성장(成長)함에 따라 총명(聰明)하고 지략(智略)이 뛰어나 알지(閼智)라 이름하였고 시림(始林)도 닭이 울었다 하여 계림(鷄林)이라 부르게 되었다. 후손(後孫)들은 추존(追尊) 세조대왕(世祖大王)이라 하였다.

알지(閼智)의 아들은 세한(勢漢)이며 그 뒤의 계보(系譜)는 아도(阿道), 수류(首留), 욱보(郁甫), 구도(仇道)로 이어지며 구도(仇道)의 아들은 김씨(金氏)로서는 처음으로 왕위(王位)에 오른 미추니사금(味鄒尼師今)이다. 이는 알지(閼智)의 7세손(世孫)이며 신라(新羅)의 13대왕(代王)이시다. 왕비(王妃)는 석강조(昔康造)의 딸로 마정부인(摩貞夫人)이다.

역대인물 - 경주김씨 조상인물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보실수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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