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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안동 장(張)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1. 3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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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안동 장(張)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안동장씨
성씨 장(張)
작품명 여명(黎明)
조각가 이상필
조형물번호 228

 

먼저 안동장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안동장씨 조형물은 근엄함과 청해진 대사 장보고의 현손인 점을 감안하여 본 조형물을 구상하였죠. 조형물 상부 관모의 형상을 위엄있는 형상을 통하여 안동장씨의 선조들의 업적을 후손들이 더 나은 미래로의 번영을 이룩하고자 함이라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안동장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안동장씨의 시조는 장길(張吉)이고, 자(字)는 영보(寧父), 호(號)는 포음(圃蔭)이고, 시호는 충헌(忠獻)입니다. 후에 다른 나라에서 쓰던 이름으로 공(功)을 세움이 의(義)가 아니라고 여겨 장정필(張貞弼)로 고쳤습니다.

그는 청해진대사 장보고(張保皐) 장군의 현손입니다. 장보고 장군 사후에 그 가족들은 당나라 적산촌으로 이주하였으며, 시조는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에서 태어났습니다. 그래서 시조를 소개하는 후일의 기록들에서 당나라 절강성 소흥부 사람이라 하였죠.

시조는 대략 다섯 살 되던 해에 바다를 통해 가족들과 함께 다시 신라로 돌아 왔으나, 당시 신라 또한대단히 혼란하던 시절이었죠. 그는 성장하면서 입당수학의 꿈을 갖고 있었는데, 마침내 기회를 얻어 당나라에 들어가 학문에 전심한지 6년 만인 24세 때에 장원으로 급제하였습니다.

후일 관직이 이부상서에 이르게 되었고, 그의 문장과 덕행이 중원에 높이 드날리게 되었으나 무고(誣告)를 당하여 결국 다시 고국으로 돌아오게 됩니다. 930년 고려 태조와 견훤 간에 벌어진 고창(古昌: 지금의 안동)의 병산 전투에서 시조 장정필은 고창성주 김선평, 영장(營將) 김행과 더불어 태조를 도와 큰 승리를 거두었습니다.

태조는 김선평을 대광으로 삼고 장정필 시조와 권행을 대상(大相)으로 삼았으며. 고창을 승격시켜 안동부라 하였습니다. 태조는 이들 세 사람에게 안동(安東)으로 사관하고 식읍을 삼게 하였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안동장씨의 인구는 39,939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MFtj5iYgWczjej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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