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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옥천순창 조(趙)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1. 27.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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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옥천순창 조(趙)씨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옥천순창(玉川 淳昌)
조씨
성씨 조(趙)
조형물번호 225

먼저 옥천순창조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시조 고려 광록대부 검교문하시중(高麗光祿大夫 檢校門下時中) 조장(趙璋)을 중심으로 “생사진퇴(生死進退) 무괴의자(無愧義字)” 즉, 삶과 죽음, 나아감과 물러남에 있어 옳을 '의'라는 글자의 뜻에 부끄러움이 없도록 하라는 4세조 옥천부원군(玉川府院君) 충헌공(忠獻公) 조원길(趙元吉)의 유훈을 담아 전 종친들 간의 화목과 단결로 현재와 미래가 떠오르는 태양처럼 세계속에 우주를 향하여 비상을 상징하였습니다.

 

조형물의 중앙 받침석은 시중공 “조장(趙璋)” 을 의미하며, 높은 장석은 충헌공 조원길(趙元吉)의 의로운 정신으로 우뚝 세웠죠. 심벌마크의 모형석은 동쪽에서 떠오르는 태양을 형상화 하였으며, 맨 위에 있는 노란색 원형은 우주를 표현하고, 전체 조형물을 백석과 오석으로 조화를 이루게 하였습니다. 전면 오석에 새긴 글은 옥천(순창)조씨의 유래와 시조부터 5세조까지의 업적을 새겼죠. 후면 오석에는 이 조형물을 만드는데 모든 종인들께서 힘을 모아 동참했다는 뜻으로 시조부터 8세조의 세계도를 넣었습니다.

그럼 이제 옥천순창조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순창(淳昌)은 백제시대 도실군(道實郡)인데 통일신라 경덕왕 때 순화군(淳化郡)으로 개칭하였습니다. 고려 때는 순창(淳昌)으로 고쳐서 남원부(南原俯)에 속하였고 충숙왕 원년(忠肅王 元年)에 승격시켜 군(郡)이 되었으며 조선시대를 거쳐 지금까지 순창군으로 이어 오고 있습니다. 옥천은 순창의 고호이며, 1702년에 시보 발행 시 본관을 순창(淳昌)으로 부르다가 1890년에 대동보(大同譜)에는 본관을 玉川(淳昌)으로 병행 발간해서 사용하고 있습니다.

옥천(순창)조씨는 고려에서 광록대부 검교대장군 수 문하시중을 지낸 조장(趙璋)을 1세조로 하여 세계를 이루어 왔습니다. 조장의 아들 조홍규(洪珪)가 판도판서를 지냈고, 손자 조전(趙佺)이 삼한벽상공신으로 옥천부원군에 추증되었으며, 조전의 동생 조여(趙璵)가 문하시중 평장사를 역임하였죠.

고려말 趙씨를 현족으로 자리하게한 인물은 4세조 농은(農隱) 충헌공 조원길(趙元吉)에 의하여 이루어집니다. 고려 충목왕 1년에 등과하여 관직이 검교문하시중에 이르렀는데 정몽주, 설장수 등과 공양왕 옹립 일등공신이 되어 대광보국 광록대부 추충분의 익대필성 극복공신 옥천부원군에 봉해졌죠. 은퇴후 목은(牧隱) 포은(圃隱) 도은(陶隱) 야은(冶隱)과 더불어 오은(五隱)이라 칭하였습니다.

조원길의 장남 조영(趙瑛)은 고려조 전공 판서를 지냈고, 차남 조유(趙瑜)는 고려조 전농시 부정을 지냈습니다. 조선조 태종이 조영에게 이조판서와 세자 사부를, 조유에게 한성부 판윤을 명했으나 형제모두 불사이군이라 절의를 지켰고, 조유(趙瑜)가 서거후 세종이 예관을 보내 장사지내고 “효자전 부정 조유지려(孝子前副正趙楡之閭)”라는 정려를 내렸습니다.

삼남 조근(趙瑾)은 이조 때 광양현감, 사남 조염(趙琰)은 보공장군 절제도위겸 북도함성만호장을 지냈죠. 4세조 지후공 조원기(趙元琦)의 아들 조연(趙淵)은 조선시대 이조판서, 조완(趙浣)은 정순대부 서주부사로 후대로 내려가면서 문세가 번창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옥천순창조씨의 인구는 본관 옥천 53,406명, 순창 34,069명으로 합계 87,475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MFtj5iYgWczjejwR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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