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영해 이(李)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영해 이씨
성씨 이(李)
작품명 충효의 얼
조각가 박찬석
조형물번호 179
먼저 영해이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영해이씨는 6분의 효자정려를 받은 가문으로 불사이군의 충절을 지킨 선조들과 현대의 반공소년 이승복군의 기개를 세 개의 곡선적 직선의 주 조형물로 상징했습니다. 중앙의 브론즈 조형물은 만개한 꽃을 표현하여 효자의 귀감이 되는 영해이씨 가문의 발전과 번영을 담고자 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영해이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영해이씨의 시조는 이연동(李延東)으로 고려 후기 문하시랑평장사를 지내고 영해군에 훈봉되었으며, 신라의 사도 이입전(李入全)의 후예로 전해지며 완산에서 이적하여 시조의 군호(君號)인 영해를 본관으로 삼았습니다.
2세 이선(宣)은 별장동정을 3세 이을년(乙年)은 공민왕 9년에 문과에 급제하여 중현대부내부령을 4세 이장밀(長密)은 고려 말 호부전서를 지냈고 조선개국에 불응하여 강릉(江陵)으로 은둔하였습니다.
그의 아들 이성무(成茂), 이선무(善茂), 이춘무(春茂), 이양무(良茂) 4형제는 효성이 극진하여 한겨울 얼음속의 잉어를 구하여 어머니를 구병한 효행으로 태종 17년에 4형제가 효자정려를 받고 세종의 명으로 편찬한 삼강행실도에 실려 만백성의 사표가 되었습니다.
14세 이당(堂), 이민(敏) 형제 또한 죽음으로써 부모를 섬긴 효행으로 숙종 32년에 정려를 받아 『영해이씨 2세 6효』의 졍려각이 강릉시 교동에 세워졌습니다. 이 고을이 예향(禮鄕)이라 불리게 된 것은 영해이씨의 이런 효행이 그 근원이 되었죠.
10세 이오(璈)는 선조 33년에 문과에 급제하고 홍문관 교리와 태안군수를, 아들 이상혐(尙馦)과 이상빈(尙馪) 형제는 광해군 7년에 형제 동방급제는 물론 아우는 장원 급제였습니다. 이들 3부자의 문명은 중국의 소노천(蘇老泉)과 비견되기도 하였죠.
이와 같이 옛날에는 충신, 효자, 열려, 현대에는 「나는 공산당이 싫어요」라고 외친 반공 소년 이승복(李承福)군도 영해인입니다.
영해이씨는 6개종파로 나뉩니다. 주부공파(11세 상복尙馥) 감찰공파(11세 상필尙馝) 동명공파(10세 오璈) 강서공파(11세 상빈尙馪) 진사공파(11세 상암尙馣) 여주파(4세 장익長翼)입니다.
이와같이 선조들은 우리를 명문으로 우뚝 서게 했으니 앞으로 후손들은 더욱 정진하여 성족(盛族)의 소망을 여기에 새깁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영해이씨의 인구는 2,466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4xYqseCRyIXP5YRG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카테고리의 다른 글
추계 추(秋)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1) | 2024.12.02 |
---|---|
함평 정(鄭)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1) | 2024.12.01 |
부평 이(李)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0) | 2024.11.29 |
창원 황(黃)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0) | 2024.11.28 |
월성 박(朴)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0) | 2024.11.27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