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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화 류(柳)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8. 8.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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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문화류(柳)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문화류씨
성씨 류(柳)
작품명 충·의·효·열(忠·義·孝·烈)
조각가 석현
조형물번호 73

먼저 문화류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문화류씨의 충의효열(忠義孝烈)과 범 설화를 모태로 형상화 시킨 작품입니다. 선조들의 충, 의, 효, 열을 현대 이미지와 미래 지향적 이미지로 표현 했죠. 그 기상의 염원을 담아 후세에 길이 번영하기를 기원하는 의미를 지니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문화류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문화류씨(文化柳氏) 시조 대승 류차달(大丞 柳車達)은 황해도 유주(儒州:文化縣) 태생으로 고려 개국에 큰 공을 세워 대승의 관직과 삼한공신(三韓功臣)의 훈호를 받았습니다.

그의 아들 좌윤 류효금(佐尹 柳孝金)은 구월산을 지나다가 큰 범을 만나 그 입 속에 걸려 있던 비녀를 빼내 주었다고 하죠. 그날 밤 꿈에 범이 나타나 이르기를 『나는 산신령인데 무슨 물건이 목에 걸려 심히 괴롭던 중 그대가 나를 구해 주었으니 그 음덕으로 그대의 자손은 반드시 대대로 경상(卿相)이 되리라』했다고 하죠.

그 후 문간 류공권(柳公權), 문정 류경(柳璥) 등 수대를 연이어 시호를 하사 받음으로서 고려조에 소위 사세오공(四世五公)이 벌족으로 일컬어졌습니다. 조선조에 들어와 134인이 대과에 급제하여 음사를 포함, 실직당상관이 90여 인에 이르고, 22명이 시호를 하사 받았습니다. 그 중에 상신 9인, 호당 5인, 청백리 4인, 공신 11인이 배출되었죠.

국초의 청렴재상 하정 류관(柳寬), 사육신 낭간 류성원(柳誠源), 을사사화 때 강직대신 송암 류관(柳灌), 임진왜란 때 선무공신 문흥군 류사원(柳思瑗), 실학의 원조 반계 류형원(柳馨遠), 발해고 저자 영재 류득공(柳得恭) 등은 특히 드러난 분이죠. 그리고 초야에서 학문에 전념하여 유학에 정통하고 언행이 바른 사람과 충의효열로 정려와 부역이나 조세면제의 은전을 받은 분이 80여인에 이르고, 무과 및 소과에 급제한 분은 헤아릴 수 없을 정도 많죠.

이렇듯 많은 인물을 배출하여 국가와 명운을 함께 한 문화류씨는 고려 때 4대 명족, 조선 때 8대성으로 일컬어 왔습니다. 더욱이 문화류씨의 영락보(永樂譜)와
가정보(嘉靖譜)는 우리나라 족보의 효시(嚆矢)로서 동서양을 막론하고 계보학(系譜學) 연구의 세계적 문헌으로 널리 알려져 있죠.

이상은 고려사 및 동국여지승람, 조선왕조실록, 국조방목, 증보문헌비고, 연려실기술 등 공가문헌(公家文獻)을 철저히 고증한 기록입니다. 근세에 문화류씨와 차씨 간에 동조이성(同祖異姓) 운운하였는데 이는 위서(僞書)를 오인(誤認)한 소치로서 근년에 제반 공가문헌에 의하여 사실무근임이 판명되었다고 하죠.

문화류씨 후손 모두 전감후계(前鑑後戒)의 지혜를 되새겨 떳떳하고 자랑스러운 명문(名門)의 전통을 지켜나가야겠습니다. 문화류씨 대종회 자료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문화류씨의 인구는 90,313명이었습니다.

 

https://youtu.be/awo6nAwTWWE?si=Ek4_SjBhz3_YsPEl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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