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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월성 김씨(月城金氏) 시조, 김광우, 월성김씨 조상인물, 월성김씨 유래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6. 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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월성 김씨(月城金氏) 시조, 김광우, 월성김씨 조상인물, 월성김씨 유래

 

월성김씨시조 및 월성김씨유래(본관)

월성김씨(月城金氏)는 경순왕(敬順王)의 셋째 아들 영분공(永芬公) 김명종(金鳴鍾) 16세손 김남길(金南吉 : 고려 때 평장사를 역임)의 아들 형제 중 장자인 김이진(金以珍) 일세조(一世祖)로 하고 있다.

그는 누대(累代)로 월성에 세거(世居)하던 사족(士族)의 후예로 벼슬을 지내며 명문(名門)으로서의 기틀을 굳건히 다져왔고, 그의 현손(玄孫) 세천(世天)이 훈련원 판관(訓鍊院判官)을 역임했으며, 세천의 맏아들 응록(應錄)은 전서랑(典署郞)을 지냈다.

한편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전투에서 공()을 세운 응복(應福 : 세천의 둘째 아들)은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사복시정(司僕寺正)을 지내고 병조 참판(兵曺參判)에 추증되어 가문(家門)을 일으켰으며, 그의 아들 윤해(允諧)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여 가통(家統)을 이었다.


다른 한 계통의 월성(月城)은 조선말기(朝鮮末期) 행정구역명인 황해도(黃海道) 토산(兎山)의 옛 지명으로 일찍이 고구려(高句麗)시대에는 오사함달현(烏斯含達縣) 또는 월성현(月城縣)으로 불리우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때 와서 토산현(兎山縣)이 되었다.

그후 1895(고종 32) 토산군(兎山郡)으로 승격하였으며 1914년 군()을 폐하여 미원면(美原面)은 신계군(新溪郡)에 들어가고 그 나머지 지역은 금천군(金川郡)에 편입되었다.


월성김씨(月城金氏)의 시조(始祖) 김광우(金光佑)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넷째 아들 대안군(大安君) 김은열(金殷說) 15세손으로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세종(世宗) 때 덕천 군수(德川郡守)로 나가 있으면서 직간(直諫)을 하다가 평안도(平安道) 성천(成川)으로 유배(流配)되어 그곳에서 살게 되었으므로 후손들이 광우(光佑)를 중시조(中始祖)로 하고 조상(祖上)의 연고지(緣故地) 월성(月城)을 관향(貫鄕)으로 삼게 되었다.

신라종성(新羅宗姓) 월성김씨(月城金氏)는 관향지(貫鄕地)를 달리하는 두 계통(系統)이 있다. 이를 계통별로 분류(分類)하면 첫째 계통의 월성(月城)은 경상북도(慶尙北道) 남동부(南東部)에 위치한 경주(慶州)의 옛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 개국초기에 사로국(斯盧國) 또는 서라벌(徐羅伐)이라 하였다가 후에 신라로 불려오던 중 서기 65(탈해왕 9)에 계림(鷄林)으로 고쳤다.

그후 기림왕(基臨王 : 15대 왕, 재위기간 : 298310) 때 다시 신라로 고쳐 불렀으나 고려(高麗)가 신라를 합병하여 경주(慶州)라 칭했다가 987(성종 6)에는 동경(東京) 이라 하였다. 1415(태종 15)에 와서 경주부(慶州府가 되었고, 1955년 경주시(慶州市)를 설치하면서 나머지 지역을 월성군(月城郡)으로 개칭하여 오늘에 이르렀다.


그러나 문헌(文獻)에 전()하는 바에 의하면 평안도(平安道) 성천군(成川郡) 통선(通仙)에 세거(世居)하던 토산 김씨(兎山金氏)의 후손들이 월성 김씨로 개관(改貫)했다고 하며, 「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에는 고려 충렬왕(忠烈王) 때 도첨의 찬성사(都僉議贊成事)를 지낸 김부윤(金富允)이 토산 김씨(兎山金氏)의 시조(始祖)로 기록되어 있다.

「월성김씨무진보(月城金氏戊辰譜)」에 의하면 중시조 광우(光佑)는 문장(文章)과 학행(學行)으로 당대에 명성을 떨쳤고, 차남 계안(季安)과 손자(孫子) 거물(巨物)은 기자전 참봉(箕子殿參奉)을 역임하였다.

한편 어모장군(禦侮將軍) 중보(重寶)의 아들 지현(智賢)은 효성(孝誠)과 학행(學行)으로 이름을 떨쳐 세칭<관서대현(關西大賢)>으로 일컬어졌으며 1615(광해군 7)에 정려(旌閭)를 특사(特使) 받아, 훈련원 봉사(訓鍊院奉事)를 재낸 자감(自堿 : 첨지중추부사 중길의 맏아들)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월성 김씨(月城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87,268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월성김씨조상인물

김정윤(金正潤) 자는 덕중(悳中). 고려조(高麗朝)에 병부 시랑(兵部侍郞)을 지냈다.

김남길(金南吉) 고려(高麗)에서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하였다.

김세천(金世天) ()는 공백(空白), ()는 송학(松鶴). 조선조(朝鮮朝)에 동학 훈도(東學訓導)를 지냈다.

김응록(金應錄) ()는 사경(士卿), ()는 송정(松亭). 1592(선조 25) 임진왜란 때 창의(倡義)하여 공()을 세워 선무원종공신(宣武原從功臣)으로 우림장 겸 사복시정(羽林將兼司僕寺正)을 지냈고, 장흥고 직장(長興庫直長)을 역임하였다. 병조 참판(兵曺參判) 추증(追贈), 창의사(彰義祠)에 제향(祭享)되었다.

김윤해(金允諧) ()는 윤중(允仲), ()는 만포(晩圃). 조선(朝鮮)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맹형(金孟亨) 조선조(朝鮮朝)에 어모장군(禦侮將軍)에 이르렀다.

김득기(金得己) 조선에서 장사랑(壯士郞)에 올랐다.

김정모(金鼎模) 자는 낙귀(洛龜). 조선 때 의관(議官)을 역임하였다.

김처택(金處澤) 자는 중윤(仲潤).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덕성(金德成) 조선조(朝鮮朝)에 부호군(副護軍)을 지냈다.

김원곤(金愿坤) ()는 윤길(尹吉). 조선 때 부호근(副護軍)을 지냈다.

김동표(金東表) 자는 달숙(達淑). 조선에서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했다.

김한장(金漢墇) ()는 공상(公相), ()는 충암(忠菴). 조선조(朝鮮朝)에 선전관(宣傳官)을 역임했다.

김지수(金之洙) ()는 노백(魯伯). 조선 때 좌찬성(左贊成)을 역임하였다.

김국영(金國暎) 조선 때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를 역임하였다.

김이황(金履璜) 조선에서 감찰(監察)을 지냈다.

출처 : 한국성씨총감 200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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