상산김씨(商山金氏) 시조, 김수(金需), 상주김씨, 상산김씨 조상인물
상산김씨시조 및 상산김씨유래(본관)
상산김씨(商山金氏)의 始祖 김수(金需)는 신라국씨(新羅國氏)에서 분파되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문헌의 증거가 없으며, 고려(高麗)때 보윤(甫尹)을 지내고 누대(累代)에 걸쳐 상산(商山:상주의 옛 지명)에 살았으며, 그의 손자(孫子) 식(湜)과 증손(曾孫) 희일(希逸)은 집사성(執事省:국가의 기밀과 서정을 관장하던 최고의 행정기관)의 으뜸 벼슬인 시중(侍中)을 지냈다. 현손(玄孫) 비궁(匪躬)은 찬성사(贊城事 : 문하부의 정2품 관직)을 역임한 후 상산부원군(商山府院君)에 9세손 일(鎰)은 대호군(大護軍)을 지내고 상락군(上洛君)에 봉해졌으며, 10세손 녹(祿)은 판사(判事)로 상성군(商城君)에 봉군되었다.
후손들은 수(需)를 시조(始祖)로 하고 상산(商山)을 관향(貫鄕)으로 삼아 세계(世系)를 이어오면서, 고려(高麗)와 조선조(朝鮮朝)에 걸쳐 훌륭한 명신(名臣)을 많이 배출시켰다.
本貫地의 沿革
상산(商山)은 경상북도 상주(尙州)의 옛 지명(地名)으로 삼한시대(三韓時代)에 진한(辰韓)의 영토였으며, 서기 185년(신라 벌휴왕2) 사벌국(沙伐國) 또는 사불(沙弗)로 독립해오다가 신라 첨해왕(沾解王:제12대 왕, 재위기간 : 247~261)때 상주(上州)라 하였다.
그후 상락군(上洛郡) 사벌주(沙伐州)로 불리우다가 경덕왕(景德王:신라 제35대 왕, 재위기간 : 742~765)이 상주(尙州)로 개칭하였다.
氏族의 槪觀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상성군(商城君) 녹(祿)의 맏아들 득배(得培)가 1359년(고려 공민왕8) 홍건적(紅巾賊)이 침입했을 때 서북면 도지휘사(西北面 都指揮使)로서 이방실(李芳實)ㆍ안우(安祐) 등과 함께 이를 격퇴하여 그 공으로 수충보절공신(輸忠保節功臣)에 책록되고 정당문학(政堂文學)이 되었으며, 1361년(공민왕10) 다시 20만의 홍건적이 압록강을 건너 개경(開京)까지 쳐들어와 왕(王)이 복주(福州)로 피신하는 치욕적인 상황에서 정세운(鄭世雲)ㆍ이방실(李芳實)ㆍ최영(崔瑩)ㆍ이성계(李成桂) 등과 함께 반격하여 개경(開京)을 수복하는 데 공(功)을 세웠다.
한편 원종(元宗)때 중랑장(中郞將)을 지낸 충(忠)은 문하시중(門下侍中) 치원(致遠)의 손자로 삼별초(三別抄)의 난(亂)을 진압하는데 공을 세웠으며, 1281년(충렬왕7) 일본(日本)을 정벌(征伐)할 때 공을 세워 기성군(箕城君)에 봉해졌고, 그의 증손(曾孫) 운보(云寶)와 신보(臣寶)형제는 1353년(공민왕2) 왜적(倭賊)이 침입했을 때와 홍건적의 난(亂)때 함께 공(功)을 세워 판전의시사(判典義侍事)와 봉순대부(奉順大夫)에 각각 올랐다.
특히 운보(云寶)는 이성계(李成桂)를 도와 개국원종공신(開國原從功臣)에 서훈되고 중추원부사(中樞院副使) 겸 사복시(司僕侍)에 이르렀으나, 아우 신보(臣寶)는 벼슬을 버리고 전남 영광(靈光)으로 낙향하여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을 지켰다.
상산김씨중에는 金臣寶처럼 李太祖의 조선 개국에 반발한 분도 적지 않다. 洛城君 金先致는 杜門洞에서 풍월을 벗삼다 일생을 마쳤고, 提學公 丹邱齊 金 後는 鄭夢周가 살해당하자 挽詩를 지어 통곡하고는 頭流山(지금의 智異山) 아래 丹城懸 法勿里에 들어가 후학을 가르치며 세월을 보냈다.
운보의 아들 덕생(德生)은 태조(太祖)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낭장(郎將)으로 재직시 방원(芳遠:후에 태종이 됨)이 사냥을 하다가 표범의 습격을 받아 신변이 위험했을 때 화살로 표범을 쏘아 죽여 말(馬)을 하사(下賜)받았으며, 뒤에 호군(護軍)을 거쳐 세종(世宗)때 가정대부(嘉靖大夫)ㆍ동지중추원사(同知中樞院事)로 추증되었다.
세종(世宗)때 무신(武臣)으로서 두 차례에 걸쳐 침입한 야인(野人)을 무찌르고 무용(武勇)을 떨친 사우(師禹)는 1460년(세조5) 한성부윤(漢城府尹)으로 신숙주(申叔舟)와 함께 두만강(豆滿江) 밖 모련위(毛憐衛)의 야인(野人)을 토벌하고 지중추원사(知中樞院事)에 이어 판한성부사(判漢城府事)를 지낸 후 병조판서(兵曹判書)에 올랐다.
순천부사(順天府使) 우생(佑生)은 정몽주(鄭夢周)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배워 구경(九經)ㆍ사서(四書)에 통달하였고, 성삼문(成三問)ㆍ박팽년(朴彭年) 등과 친분이 두터운 사이로 단종(端宗)이 억울하게 숨졌다는 소식을 듣고 음독자결한 절신이며, 세종(世宗)때 친시문과(親試文科)에 급제한 양경(良경)은 공조판서(工曹判書)와 대사헌(大司憲)에 올라 판돈령부사(判敦寧府事)를 지낸 광준(光準), 옥과현감(玉果縣監) 범(範), 군수(郡守) 염(廉) 등과 함께 이름을 날렸다.
1547년(명종2) 알성문과(謁聖文科)에 급제한 귀영(貴榮)은 호당(湖當)에 뽑혀 사가독서(賜暇讀書)를 하고 이조판서(吏曹判書)를 8번, 대제학(大提學)을 6번 지냈으며, 사신(使臣)으로 북경(北京)을 9번이나 왕래하며 정치적인 공적을 쌓고 1581년(선조14) 좌의정(左議政)에 이르렀으며, 평난이등공신(平難二等功臣)으로 상락부원군(上洛府院君)에 봉해진 후 기로소(耆老所:나이가 많은 문신들을 예우하기 위해 설치한 기구)에 들어갔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선조(宣祖)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조좌랑(吏曹佐郞)ㆍ좌부승지(左副承旨)ㆍ대사간(大司諫)ㆍ형조참의(刑曹參義)등을 지내고 강릉부사(江陵府使)로 나갔던 홍미(弘微)와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 덕겸(德謙)이 유명했고, 덕함(德諴)은 대사성(大司成)ㆍ대사간(大司諫)을 거쳐 춘천부사(春川府使) 등을 지낸 후 1636년(인조14) 청백리(淸白吏)에 녹선되어 첨절제사(僉節制使) 여기(礖器), 형조판서(刑曹判書) 우석(禹錫), 호조판서(戶曹判書) 연(演)과 함께 명성을 날렸다.
숙종(肅宗)때 춘당대시(春塘臺試:왕실에 경사가 있을 때 임금이 친림하여 춘당대에서 보이던 과거)에 급제한 동필(東弼)은 경종(景宗)때 대사간(大司諫)이 되었고, 영조(英祖)때 우승지(右承旨)ㆍ한성부판윤(漢城府判尹)을 거쳐 이조판서(吏曹判書)에 올라 영조의 탕평책(蕩平策)(영조 임금이 당쟁을 해소하기 위해 당파간의 정치세력에 균형을 꾀한 정책)을 도와 당쟁완화에 힘썼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용구(容球)가 을사조약(乙巳條約)이 체결되자 향방(鄕坊) 사우(士友)들과 <일심계(一心契)>를 조직하여 항거했으며, 기삼연(奇參衍)과 함께 수백명의 의사(義士)를 이끌고 수련산(秀蓮山)에서 혈맹(血盟)한 뒤 왜병(倭兵) 수백을 참살(慘殺)하고 전국 각처에서 많은 전과를 올렸으나, 한일합방(韓日合邦)의 비보를 듣고 음독자결 하였으며, 충절의 전통을 이어온 명문(名門) 상산김씨(商山金氏)는 남한(南韓)에 약 2만여가구에 81,650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 주요인물-상산김씨조상인물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4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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상산김씨시조 및 상산김씨유래(본관) 상산김씨(商山金氏)의 始祖 김수(金需)는 신라국씨(新羅國氏)에서 분파되었으나 세월이 오래되어 문헌의 증거가 없으며, 고려(高麗)때 보윤(甫尹)을 지내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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