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안김씨(扶安金氏) 시조, 김일, 부안김씨 조상인물
부안(부령)김씨의 연원
부안(扶安)은 전라북도(全羅北道) 남서부(南西部) 변산반도(邊山半島)에 위치한 고장으로 백제(百濟) 때에는 개화현(皆火縣)이었다가 통일신라(統一新羅) 시대에는 부령현(扶寧縣) · 계발(戒發)이라 하였으며. 서기 1414년 (조선 태종 14)에 보안(保安)과 부령현(扶寧縣)을 합하 여 지금의 부안현(扶安縣)으로 개칭되었다.
부안(부령) 김씨(扶安(扶寧)金氏)는 신라 마지막 임금인 경순왕(敬順王)의 맏아들 김일(金鎬)을 시조(始祖)로 하여 고려(高麗) 시대에서부터 부안(扶安)에 뿌리를 내렸다. 父王인 敬順王이 臣下를 모아놓고 新羅를 高麗에 讓國함이 어떠냐고 묻자 贊反兩論이 일자 公이 나서 말하기를 國家 의 存亡은 반드시 天命이 있는 것이니 忠臣義士와 더부러 民心을 收捨하여 스스로 굳게 지키다가 힘이 다한 후에 議論함이 옳을 것인데 어찌 千年社稷을 하루 아침에 다른 나라에 넘겨줄 수 있읍니까 하니 父王은 百姓을 사랑하는 마음으로 이를 듣지 아니하고 高麗에 請讓하니 太子公께서는 痛突하면서 父王을 이별하고 母后竹房王后와 太子妃金氏 여동생 德周公主를 거느리고 따르는 忠臣義士와 愛國臣民과 더불어 皆骨山에 들어가 城을 쌓고 麻衣草食하며 祖國 光復을 圖謀하고저 抗麗運動을 하시 다가 一生을 마치다.
그의 큰아들 기로(箕路)가 심산유곡인 변산에 숨어들어와 살면서 그의 후손이 부령 (부안) 땅에 뿌리를 내렸다.
그의 자손(子孫) 경수(景修)가 고려 선종(宣宗 · 제13 대 왕, 재위기간 : 1084-1094) 때 처음으로 세상에 나 와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지낸 후 부령(扶寧 : 부안의 예 지명)에서 정착(定着)하고. 그 의 아들 춘(春)이 부령부원군(扶寧府院君)에 봉해졌으므 로. 관향(貫鄕)을 부령(扶寧)으로 하게 되었다.
고려 때 부안 김씨(扶安金氏)를 빛낸 인물(人物)로는 1222년(고종 9) 열 두 살의 어린 나이로 성균관 진사에 오른 구(坵)를 들 수 있다.
그는 고종(高宗 : 고려 제23대 왕, 재위기간 : 1213~1259)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여 정원부사록(定遠府司錄)과 제주 판관(濟州判官)을 거쳐 원종(元宗 : 제24대 왕, 재위기간 : 1259~1274) 때 예부 시랑(禮部侍郞)으로 서장관(書狀官)이 되어 원(元)나라에 다녀와 「북정록(北征錄)」을 집필하고 40여년 간 벼슬을 역임하며 정치․외교․학문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다.
구(坵)의 아들 4형제가 모두 과거에 급제하여 가문을 빛냈는데, 그 중 장남 여우(汝盂)는 충렬왕(忠烈王)이 세자(世子) 때 원(元)나라에 4년 간 볼모(두나라 사이의 우호관계를 보증하기 위하여 사람을 담보로 잡아두는 일)로 가 있을 때 이를 호종한 공(功)으로 형부 상서(刑部尙書)에 올랐고, 차남 종우(宗盂)는 수창궁(壽昌宮) 녹사(綠事)를 거쳐 전교시 부령((典校寺副令)을 지냈으며, 셋째 숙우(叔盂)는 서도판관(西都判官), 막내 승인(承印)은 강릉 존무사(江陵存撫使)와 대사성(大司成)을 역임하였다.
여우(汝盂)의 두 아들 각(恪)과 식(軾)도 평장사(平章事)와 이부 상서(吏部尙書)를 각각 역임하여 명문(名門)의 대(代)를 이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 들어와 운강(雲江) 계(啓)가 유명했다.
1552년(명종 7) 식년문과(式年文科)에 급제한 그는 헌납(獻納)을 거쳐 선조(宣祖) 때 성절사(聖節使)로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한어(漢語)에 능통하여 승문원 부제조(承文院副提調)로 발탁된 뒤 이조 참판(吏曹參判)에 이르렀다.
특히 그는 문무(文武)를 겸비하여 이 황(李 滉)․김인후(金麟厚)․기대승(奇大升)․이 이(李 珥) 등과 함께 도의(道義)를 강론했다.
기묘명현(己卯名賢 : 기묘사화로 화를 입은 유신들) 석홍(錫弘)의 아들 해(垓)는 임진왜란 때 선조(宣祖)를 호종하여 호성원종공신(扈聖原從功臣)이 되었고, 정묘호란(丁卯胡亂) 때는 소모사(召募使)로 활약하였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인조(仁祖)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예조 정랑(禮曹正郞)에 올라 문명(文名)을 떨친 호(灝)와 공조 참판(工曹參判) 한익(漢益)이 유명했으며, 익(瀷)은 호남(湖南)의 거유(巨儒)로 일생동안 학문(學問) 연구에 전력하여 경서(經書)에 밝았고, 문하에서 많은 학자(學者)가 배출되었다.
익(瀷)의 아들로「서호별곡(西湖別曲)」을 지은 상성(相誠)은 우리나라 국문학사에 훌륭한 업적을 남겼으며, 후창(後滄) 택술(澤述)은 간재(艮齋) 전 우(田 愚)의 문하(門下)에서 학문을 연마하여 조선 말기 호남지역의 대표적인 성리학자(性理學者)로 일컬어졌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부안김씨(扶安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48,961명이 부령김씨는 14,38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부안김씨조상인물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3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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