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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 김(金)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4. 5. 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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오늘은 영산 김(金)씨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영산김씨 #문중의유래 #한국인의성씨 #성씨와본관

영산김씨
성씨 김(金)
작품명 永山金氏淵源
조각가 김 철 이 報恩承旨公派22世孫 (찬미미술원 성림조각회장)
조형물번호 12

먼저 영산김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조선조의 대학자요, 팔대문장가(八大文章家)인 김수온(金守溫)은 창공에 높이 솟은 문필봉의 정기를 받고 태어났다 하여 작품에 문필봉을 상징화 했습니다. 아무리 뛰어난 예지와 상념일지라도 실천이 있어야 진가가 발휘되죠.
손은 실천을 상징함과 동시에 전진을 상징합니다. 월인천강지곡은 불후의 대작이요, 명작임을 손을 들어 대중에게 과시하고 있죠. 후면의 학은 현실세계와 이상세계를 조화하여 영원히 발전해 가는 영산김씨의 미래상을 상징화 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영산김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영산김씨(永山金氏)의 원조는 신라 대보공 김알지이고 신무왕의 후손입니다. 신라와 고려 양조에 걸쳐 출사입공해 오던 중 고려말의 전객서령(典客署令) 김영이(金令貽)는 쓰러져 가는 고려를 구하려고 백방으로 전력했으나 어쩔 수 없음을 알고 사직하고 낙향하여 두 아들과 세 사위도 사직하고 영동(永同)으로 은거했습니다.
장자 판도판서 김길원(金吉元), 차자 판삼사 김포(金苞)와 장서 이부시랑인 순천박공 김원용(金元龍), 차서 한성판윤 구례장공 김비(金丕), 삼서 대제학 밀양박공 김시용(金時庸) 등 이상의 어른들은 고려조에 벼슬했고 장서했죠. 신왕조 조선이 개국되자 비로소 출사 했으니 김종경(金宗敬)은 우천성을 이르렀고 이어서 아들 김훈(金訓)은 영의정이요, 그 아들 김수온(金守溫)은 당대의 대학자요, 이조 8대 문장가로 많은 시문과 저서가 있었고 벼슬은 판서 대제학 영중추 부원군에 이르렀습니다.
특히 저서 월인천강지곡은 불후의 명작이죠. 이하 후손이 지금에 이르기까지의 명인 달사가 많았지만 다 기록하기 어렵고 임정요인으로 조국독립을 위하여 활동하다가 만리이역에서 서거한 김철(金澈)의 유해가 아직 환국을 못한 것이 유감입니다(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영산김씨는 24,941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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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산김씨 문중의 유래비에 각자된 내용의 이해를 돕기 위하여 추가적인 자료를 아래에 붙입니다.

영산김씨(永山金氏)

영산김씨(永山金氏)는 김영이(金令胎)를 1세조로 받듭니다. 기록을 보면 김영이(金令貽)는 신라 제45대 신무왕(神武王)의 넷째 아들 김익광(金益光)의 후손으로 고려 때 전객서령(典客署令)을 지내고 죽은 후에 [추충동덕보사공신]으로 검교 도첨의찬성사(檢校 都僉議 贊成事)에 추증되고 영산군(永山君)에 추봉되었습니다.

시조 김영이(金令貽)의 아들 김길원(金吉元)은 고려 공민왕 때 판도판서(版圖判書)에 올라 유명하였는데 판도판서로 있을 때 홍건적을 토벌하고 공민왕을 안동으로 호종(扈從)한 공으로 영산부원군(永山府院君)에 봉(封)해지자 후손들이 김영이(金令貽)를 1세조(一世祖)로 받들고 영산(永山영산은 충청북도 영동永同의 옛 이름)을 본관으로 삼아 오늘에 이르고 있습니다.

주요파는 △보은파 △문의파 △장수파 △대덕파 △황간파 △옥천파 △온양파 △해미파 △태안파 △예산파 △당진파 △홍주파 △서산파 △송산파 △금산파 △영동파 △홍성파 △상주파 △대구파 △청도파 △청산파 △자산파 △참봉공파 △이천공파 △영광파 등이 있습니다.

https://youtu.be/GvnxMDq0T4E?si=J8LIEf15_X5LfKeT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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