오늘은 남포백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유교수가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남포 백씨 성씨 백(白) 작품명 시간의 벽을 넘어 조각가 황현 조형물번호 116
먼저 남포백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새로운 세상으로의 출발 출발했던 지점으로의 귀향은 문에서부터 시작하죠. 이 작품의 기본적인 형태는 門의 모습으로 하고 남포백씨의 白자를 형상화 했습니다. 문주(門柱)의 붉은 돌과 남포백씨 역사비와 스테인레스 연결고리는 새로운 출발과 귀향의 시점인 門에서부터 붉은 태양처럼 밝게 빛나고 길이 번성하기를 기원한다는 의미를 갖고 있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남포백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남포백씨의 시조는 신라 헌안왕(857-860)때, 벼슬이 삼중대광 좌간의대부를 지내고 시호가 익렬(翼烈)인 백중학(白仲鶴)입니다. 그는 뜻한 바 있어 벼슬을 내놓고 고향에 돌아와 후배 양성으로 일생을 마치며 남포현 일역에 학문의 길을 처음으로 정착시킨 인물입니다.
그리고 남포백씨의 현조로 숭상을 받는 연정(烟亭) 백광원(白光元)은 신라 경문왕(861-875)때 벼슬이 광록대부, 문하시중, 정당문학, 평장사를 지냈으며 문장이 뛰어나서 중국까지 명성이 높았습니다. 고운 최치원 선생이 비문을 지었으며 묘소는 남포현 양각산 서쪽 동막동에 후손 백이정의 묘와 상하로 한 곳에 현존하고 있습니다.
이로서 남포백씨는 남포현에 뿌리를 내린 후 1천 2백년 가까이 번창해 온 성씨이죠. 남포현은 현재의 충청남도 보령시의 남부지역 즉 남포면, 웅천읍, 주산면, 성주면 미산면을 포함한 지역인데 그 면적으로 보아 보령시의 절반을 차지합니다.
고려사열전과 조선시대의 역사서 동국여지승람 남포현 인물편에 백중학(白仲鶴) 그 후손으로는 고려시대의 국학대사성 백문절(白文節) 그분의 아들 상당군 백이정(上黨君 白頤正)은 남포인 이라고 기록되어 있습니다. 이러한 역사적 사실을 근거로 이 고장에서 살아온 백씨들은 남포를 본관으로 함을 자랑으로 삼고 있죠.
남포백씨의 중시조는 고려시대 고종 원종 충렬왕 등 3대에 걸쳐 왕을 섬기며 강직한 충신으로 알려진 담암(淡巖) 백문절(白文節)로 시호는 문간(文簡)입니다. 백문절은 고려 고종 때 과거에 급제하여 왕의 교지나 외교문서를 작성하는 관청인 한림원에 들어간 후 한림원의 최고위직 중서사인(中書舍人)이 되었습니다.
그 후에 이부시랑과 국자제주(國子祭酒)라는 관직을 역임했죠. 1269년 폐위되었던 원종이 복위하여 중국의 원나라에 들어갈 때, 외교문서인 표문(表文)을 백문절(白文節)로 하여금 짓게 했는데, 원종이 폐위사실을 숨기고자 함에 붓을 놓고 통곡하며 호소한 끝에 사실대로 기록했다고 하죠. 그 후 고려 최고 교육기관인 국자감의 국학대사성 · 왕족직속관청 책임자인 보문각학사가 되었습니다.
백문절의 아들인 백이정은 고려 때의 성리학자이며 호는 이재(彛齋) 시호는 문헌(文憲)으로 충렬왕 때 문과에 급제하고 충선왕을 따라 연경에 가서 10여년간 머무르며 주자학을 연구 통달하고 돌아와 이제현, 박충좌 등 제자를 가르킴으로써 우리나라 성리학을 전파 시키는데 큰 공을 세웠습니다.
충선왕 때 상의회의 도감사가 되었고 뒤에 상당군에 봉해졌습니다. 남포백씨는 신라 헌안왕 때 현단위로는 백씨 중에서 최초로 관직에 오른 백중학을 시조로 역사적 사실이 명확하며 1천 2백여 년의 역사를 지닌 자부심을 갖고 남포관향을 지키면서 충신 공신 유학자 등 역사적으로 걸출한 인재들을 배출하여 나라 발전에 기여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의 유래비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 의하면 남포백씨의 인구는 10,907명이었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