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벼슬 관직 용어

개성부(開城府)

by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3.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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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開城府) [고려시대 관직]고려의 수도 서울을 맡은 관청으로 그 장은 판사(判事)이다.

정의
고려시대, 왕경에 설치되었던 특별 행정구역, 또는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
 
제정 목적

고려의 개성부(開城府)는 두 가지가 있었다. 하나는 왕경(王京) 지역에 설치된 특별 행정구역으로서 장관은 윤(尹)이었다. 다른 하나는 지부사(知府事)주12가 설치된 지방 행정구역이다. 이 둘은 공존하지 않았고, 하나의 연혁주1으로 정리되어 있지만 성격이나 운영에서 차이가 있었다.

 
내용 및 변천사항

고려의 왕도(王都)주13는, 919년(태조 2) 송악산 남쪽에 도읍을 정하고 이를 개주(開州)라 부르면서 조성되기 시작하였다. 당시 개주에는 궁전과 시전(市廛)주14을 세우고, 방리(坊里)주15를 구분해 5부(部)로 나누었다.

987년(성종 6)에 5부 방리를 다시 정했으며, 995년 개성부로 바꾸고 개성부윤(開城府尹)을 두어 적현(赤縣) 6현과 기현(畿縣) 7현을 관장하였다. 이 개성부는 별도의 영역이 있는 것이 아니라 적현과 기현으로 구성된 상급 단위였으며 당나라의 경조부(京兆府)를 모델로 한 것이었다.

1018년(현종 9) 개성부를 없애면서 경중(京中)주16의 5부를 별도의 행정구역으로 독립시키고 따로 경기(京畿)를 제정하였다. 이에 따라 개성현령(開城縣令)과 장단현령(長湍縣令)이 각각 3현과 7현을 관할하면서 상서도성(尙書都省)에서 직접 관할을 받았다.

1062년(문종 16)에 개성현령을 지개성부사(知開城府事)주17로 승격시키고, 서해도(西海道) 평주(平州) 관내에 있던 우봉군(牛峯郡)을 이속주3시켰다. 장단현령은 그대로 존속하였다. 주현군(州縣軍) 편성에서 개성부도(開城府道)를 두었는데, 그 정원은 보승(保勝)이 52인, 정용(精勇)이 240인, 일품군(一品軍)이 190인이었다.

1308년(충렬왕 34) 충선왕이 복위한 뒤, 급전도감(給田都監) 및 5부를 개성부에 합쳐 도성 내의 사무를 맡아 보게 하면서, 개성부의 행정상 지위가 바뀌었다. 지금까지 개성부는 지방 행정구역이었으나, 이제 도성 내의 5부까지 모두 관할하게 되면서 중앙 기관으로 승격하게 되었다.

이에 직제주5도 확대되어 판부윤(判府尹: 정2품)주6 1인, 부윤(府尹: 정3품)주7 2인(1인은 겸임관), 소윤(小尹: 정4품) 3인(1인은 겸임관), 판관(判官: 정5품) 2인, 기실참군(記室參軍: 정7품)주8 2인을 두었다. 이 가운데 부윤 이하의 관리는 서울 성안주18을 맡되, 모두 선공시(繕工寺)의 사무를 겸임하였다. 이와 별도로 개성현령을 두어 도성의 주변 지역에 관한 사무를 맡아 보게 하였다.

1356년(공민왕 5)에 품계주9를 개정해 윤(尹)을 종2품, 소윤을 정4품, 판관을 정5품, 참군주10을 정7품, 현령주11을 정7품, 현승을 정8품으로 개정하였다. 1362년(공민왕 11)에 판부사(判府事)를 더 두었는데, 그 지위는 윤의 위이고, 품계는 윤과 같았다.

그 뒤 1390년(공양왕 2) 경기를 좌도(左道)와 우도(右道)로 나눌 때 개성현은 우도에 속하였다.

접기/펼치기의의 및 평가

고려시대 왕경에 설치된 개성부는 특별 행정구역인 적도 있고, 왕경 인근에 있던 지방 행정구역이기도 했던 특수한 연혁을 가지고 있어 이를 통해 왕경과 경기의 제도적 추이를 살필 수 있다.

 
참고문헌
『고려사(高麗史)』
『고려사절요(高麗史節要)』
『신증동국여지승람(新增東國輿地勝覽)』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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개성부(開城府)
 
정의
조선시대 수도 방위를 목적으로 개성에 설치되었던 특수 행정기관.
내용

조선왕조는 수도방위를 위해 한성부 주변의 행정적 · 군사적으로 중요한 지역을 선정해 주 · 부 · 군 · 현의 일반적인 행정 체계와는 별도로 특수 행정 체계로 유수부를 설치, 운영하였다.

즉, 초기에는 고려의 국도였던 개성과 태조의 어향(御鄕 : 王家 先代의 관향)인 전주에 설치하였다. 후기에는 왜란과 호란을 겪은 뒤 한성부의 방위 체계를 강화하기 위해 멀리 떨어진 전주를 대신하여 강화 · 수원 · 광주(廣州)에 설치하여 개성을 포함하여 총 4도(都)를 운영하였다.

이곳은 태조가 개국한 곳일 뿐 아니라 고려의 옛 도읍지인 동시에 중국 사행(使行)의 유숙지인 태평관(太平館)이 설치되어 있는 곳으로서 중요시되었다.

따라서, 새로운 왕조의 수도인 한성부로 천도하게 되면서 구도(舊都)인 개성부를 통치하기 위한 특별한 조처가 요구되었다.

즉, 개성은 조선왕조 건국 후에도 태조 · 정종 · 태종 때에 잠시 조선왕조의 국도가 되었다. 그러나 1405년(태종 5) 한양으로 천도한 이후 개성의 관제는 크게 변화되어 개성유후사(開城留後司)가 설치되었고 유후, 부유후와 행정실무자들인 단사관(斷事官) · 경력(經歷) · 도사(都事) 각 1인씩을 두어 통치하였다.

그러다가 1438년(세종 20) 개성부로 개편하고 종2품 유수 2인을 두어 1인은 경기 관찰사가 겸임하게 하였다. 그 뒤 1485년(성종 16) 『경국대전』이 완성되면서 개성부의 직제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도사 1인, 교수 1인, 서리(書吏) 40인, 조례(早隷) 30여인으로 법제화되었다.

그 뒤 약간의 변동이 있었으나 대체로 이러한 직제가 지속되어 1865년(고종 2)에는 유수 2인(1인은 경기관찰사 겸임), 경력 1인, 분교관(分敎官) 1인, 검률 1인, 서리 50인, 조례 30여인 등이 소속되었다.

개성유수부는 1896년 관찰부로 개편되면서 부윤을 두었다가 다음 해 관찰부가 폐지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환원되었다.

1906년 개성군으로 강등되었다가 1930년 12월 제령(制令) 제15호에 의해 지방 행정구역이 개편됨에 따라 부제(府制)가 실시되면서 다시 개성부로 개칭되었다. 이때 부외(府外)는 개풍군이 되었다.

참고문헌
『경국대전(經國大典)』
『대전통편(大典通編)』
『대전회통(大典會通)』
『경기도사(京畿道史)』(경기도, 1979)
「조선왕조(朝鮮王朝)의 유수부경영(留守府經營)」(이존희, 『한국사연구』 47, 1984)
집필자
원영환

 

개성부(開城府) 지방관서인 개성부는 특별시 제도와 같은 특수 지방관청으로서 유후사(留後司)라고도 하는데 다음과 같은 관직을 두고 있다.유수(留守), 경력(經歷), 도사(都事), 교수(), 분교관(分官), 검률(檢律),

 

출처 : 한국민족문화대백과사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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