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언양 김씨(彦陽金氏) 시조, 김선, 언양김씨 유래, 조상인물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5. 16. 06:5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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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양 김씨(彦陽金氏) 시조, 김선, 언양김씨 유래, 조상인물

 

언양김씨시조 및 언양김씨유래(본관)

언양김씨신유보(彦陽金氏辛酉譜)」와「조선씨족통보(朝鮮氏族統譜)」의 기록에 의하면 그가 고려(高麗) 언양군(彦陽君)에 봉군되었으므로, 후손들이 본관(本貫)을 언양(彦陽)으로 하게 되었다고 한다.

언양(彦陽)은 경상남도 동북부(東北部)에 위치한 지명(地名)으로 신라(新羅)때의 거화현(居火縣)인데 경덕왕(景德王 :  35대 왕, 재위기간 742765)이 헌양(巘陽)으로 고쳤으며, 고려(高麗)때 와서 언양(彦陽)으로 바꿔 부르게 되었다.


가문을 빛낸 대표적인 인물(人物)로는 시조(始祖) ()의 손자 정보(精寶)가 고려에서 호부 상서(戶部尙書)를 지냈고, 증손(曾孫) 경숙(鏡淑)은 대장군(大將軍 :  3품 무관직 벼슬)을 역임하여 신호위 별장(神號衛別將) ( : 경숙의 아들)와 함께 이름을 날렸으며, ()의 아들 언련(彦連)은 신호위 중랑장(神號衛中郞將)을 지냈다.

한편 언양 김씨(彦陽金氏)가 자랑하는 취려(就礪)는 음보(蔭補 : 조상의 덕으로 벼슬에 오름)로 정위(正尉)에 임명되어 동궁위(東宮衛때)를 거쳐 장군(將軍)으로서 동북계(東北界를)를 진압한 후, 대장군(大將軍)이 되어 1216(高麗 고종 3) 거란군(거丹軍)의 침입을 물리치고, 1219(고종 6) 국경 경비병 출신인 부방(副將) 다지(多知)의 반란을 평정하여 참지정사(參知政事)․판호부사(判戶部事)에 올랐다.

이어 금자광록대부(金紫光祿大夫)․태자 태사(太子太師)로 특진한 후 개부의동삼사(開府儀同三司)에 이르렀으며, 평소 강직하고 청백한 성품으로 군기를 엄정히 하고 부하를 아꼈으며, 전장에서는 기발한 계교로써 많은 공()을 세웠다.

취려(就礪)의 아들 전()도 문하시중평장사(門下侍中平章事)․상장군(上將軍)․판리부사(判吏部事)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양감(良鑑 : 상장군으로 언양군에 봉군)과 변( : 첨의평리를 역임)이 유명하다.

한편 양감(良鑑)의 셋째 아들 문연(文衍)은 첨의중호(僉議中護)를 거쳐 찬성사(贊成事)에 올라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졌고, ()의 아들 윤()은 충목왕(忠穆王 :  29대 왕, 재위기간 : 13441348) 초에 찬성사(贊成事)를 거쳐 좌정승(左政丞)에 이르러 언양부원군(彦陽府院君)에 봉해졌으며 그의 아들 경직(敬直)이 문하시중(門下侍中)․검교첨의찬성사(檢校僉議贊成事)를 지내고 언양백(彦陽伯)에 봉군되어 가문을 중흥시켰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선천 군수(宣川郡守)를 거쳐 병조판서(兵曹判書)를 지내고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진 숙보(叔甫)의 아들 관() 1451(문종 1) 증광문과(增廣文科)에 급제하여 병조 정랑(兵曺正郞)을 지내고, 세조(世祖) 때는 이시애(李施愛)의 난()을 평정(平定)하는데 공()을 세워적개이등공신(敵愾二等功臣)으로 종부시정(宗簿寺正 : 왕실의 보첩을 맡아보던 관청의 정 3품 벼슬)이 되었으며, 강원도(江原道)와 황해도(黃海道)의 관찰사(觀察使)를 지낸 뒤 예종(睿宗) 초에 언양군(彦陽君)에 봉해지고 동지중추부사(同知中樞府事)에 이르렀다.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언침(彦琛)의 아들 천일(千鎰)은 임실 현감(任實縣監)을 지내고, 임진왜란 때 나주(羅州)에서 고경명(高敬命)․박광옥(朴光玉)․최경회(崔慶會) 등과 함께 의병(義兵)을 일으켜 조정(朝廷)으로부터 판결사(判決事)의 벼슬과 창의사(倡義使)의 호()를 받고 결사대를 조직하여 왜군(倭軍)과의 전투에 많은 공()을 세웠으며, 진주성(晋州城)을 사수(死守)하다가 적에게 성()을 함락당하자 아들 상건(象乾)과 함께 남강(南江)에 투신자결하여 뒤에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어 가문을 더욱 빛냈다.


그밖의 인물(人物)로는 병조 참판(兵曹參判)에 추증된 광필(匡弼)의 아들 준()이 선조(宣祖)때 무과(武科)에 급제하고 선전관(宣傳官)을 거쳐 교동 현감(喬桐縣監)을 지냈으나, 광해군(光海君)의 난정을 개탄하여 벼슬을 버리고 낙향하다가 인조반정(仁祖反正)으로 죽산 부사를 지내고 안주 목사(安州牧使) 겸 방어사(防禦使)가 되어 정묘호란(丁卯胡亂)이 일어나 안주성(安州城)이 함락되자 처자와 함께 자결하여 좌찬성(左贊成)에 추증되었으며, 중만(重萬)은 충청도 수군절도사(忠淸道水軍節度使)를 역임하여 병조 참판(兵曹參判) 석중(石重)․취련(取鍊)․군자감정(軍資監正) 도손(道遜), 중추부사(中樞府使) 덕순(德純)․창우(昌宇)․희채(禧采), 이조 참판(吏曺參判) 순봉(舜鳳), 공조 참의(工曹參議) 사호(士豪)․두열(斗烈) 등과 함께 가문을 빛냈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언양김씨(彦陽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52,652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언양김씨조상인물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9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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