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광주김씨시조(廣州金氏)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4. 13. 13:0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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광주김씨시조(廣州金氏)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

 

광주김씨시조

 

광주김씨(廣州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해 왔을 때 상장군(上將軍)으로 출정하여 이를 격퇴시켜 광주군(廣州君)에 봉해졌다.

그리하여 후손들은 시조(始祖)가 봉군(封君)된 광주(廣州)를 본관(本貫)으로 삼아 문호(門戶)를 열었으며, 녹광(綠光)의 아들 굉(閎)이 감찰 어사(監察御使)를 지내고, 손자 훤(晅 : 호는 둔촌, 감찰 어사 굉의 아들)은 당대의 명신(名臣)으로 명성을 떨쳐 명문(名門)의 지위를 굳혔다.


본관의 유래(始祖 本貫由來)

광주(廣州)는 경기도 중앙에 위치한 고장으로, 기자조선(箕子朝鮮)의 마지막 왕인 준왕(準王)이 위만(衛滿)에게 나라를 빼앗기고 남으로 망명하여 회안국(淮安國)을 세우고 한왕(韓王)이 된 마한(馬韓)의 일부였다.

서기 371년 백제(百濟)의 근초고왕(近肖古王)은 남한산(南漢山 : 경기도 광주군 중부면)에 이도(移都)하여 이 곳을 한성(漢城)이라 불렀고, 553년(백제 성왕 3, 신라 진흥왕 14) 신라(新羅)에게 나라를 빼앗겨 신라의 한산주(漢山州)가 되었다가 서기 756년(신라 경덕왕 15) 한주(漢州)로 고쳤으며, 940년(고려 태조 23)에 지금의 광주(廣州)로 개칭하였다.


대표적인 인물

원종(元宗) 때 문과(文科)에 급제한 훤(晅)은 1269년(원종 10) 사신(使臣)으로 원(元) 나라에 가서 원제(元帝)의 힘을 빌어 권신(權臣) 임 연(林 衍) 일당의 역모를 저지시켰고, 이듬해 금주(金州 : 지금의 김해) 방어사(防禦使)로 나가 삼별초(三別抄 : 고려 무신 정권 때의 특수군대)의 난을 평정(平定)하는 데 공(功)을 세워 예부 낭중(禮部郎中)․도호부사(都護府使) 등을 거쳐 좌간의대부(左諫議大夫)․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문하시랑평장사(門下侍郞平章事 : 내사문하성에 속했던 정2품의 관직)에 이르렀으며, 문장(文章)과 글씨로 명망이 높았다.

훤(晅)의 두 아들중 맏아들 남물(南物)은 안동 부사(安東府使)를 지냈으며, 개물(開物)은 충숙왕(忠肅王) 때 사헌부 지평(司憲府持平)을 역이하고 시(時)․글씨․그림에 모두 능했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공조 참의(工曹參議)를 역임한 차문(次文)과 경연관의 참찬관(參贊官)을 거쳐 통정대부(通政大夫)에 추증된 차문(次武) 형제가 유명했고, 상주 목사(尙州牧使) 경보(敬寶)와 강릉부사(江陵府使) 대근(大根), 영의정(領議政)에 추증된 희증(希曾)이 명문의 대(代)를 이었다.

특히 조선조에서 가문(家門)을 크게 일으킨 인물(人物)은 임진왜란 때의 명장(名將) 태허(太虛)를 들 수 있다.

그는 희증(希曾)의 아들로 태어나 1580년(선조 13) 무과(武科)에 급제, 옥포 만호(玉浦 萬戶)로 있다가 밀양 부사(密陽府使)에 이어 임진왜란이 일어나자 울산 군수(蔚山郡守)로서 역전의 무공을 세웠고, 난이 평정된 후 선무1등 공신으로 도총관(都摠管)․호위대장을 거쳐 지중추부사(知中樞府事)에 올랐으며, 그의 아들 수겸(水兼)도 아버지를 따라 전공을 세워 2등공신에 책록되고 안동영장(安東營將)․중추부사(中樞府使) 등을 역임했다.

공조 참의 차문(次文)의 증손(曾孫) 기(琦)는 임진왜란 때 판관(判官)으로 의병(義兵)을 일으켜 동래성(東萊城) 전투에서 부사(府使) 송상현(宋象賢)과 함께 장렬하게 순절하여 어모장군(禦侮將軍)․훈련원정(訓鍊院正)에 추증되었다.

한편 양무공(襄武公) 태허(太虛)의 사촌(四寸)인 태을(太乙)은 벼슬을 제수받았으나 사임하고 돌아와 학문으로 일생을 마쳤으며, 그의 아들 수인(守訒)도 광해군(光海君)의 패륜을 개탄하여 향리로 돌아와 영남유학(嶺南儒學)의 중진으로 일컬어진 아버지 태을(太乙)의 학문(學問)을 이었다.

한말(韓末)에 와서는 광주 김씨는 진성(振聲)․석창(錫昌)․상윤(相潤)을 비롯한 많은 항일 투사를 배출하여 충절의 전통을 이어가문을 더욱 빛냈다.


광주김씨 인구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광주 김씨(廣州金氏)는 남한(南韓)에 총 28,156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역대인물(歷代人物)은 아래 링크에서 자세히 볼 수 있습니다.

http://www.sungssi.com/news_gisa/gisa_view.htm?gisa_category=01000000&gisa_idx=11202

 

광주김씨시조(廣州金氏)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을 시조(始祖)로 한다

광주김씨시조 광주김씨(廣州金氏)는 신라 경순왕(敬順王)의 다섯째 아들인 의성군(義城君) 김석(金錫)의 7세손 김녹광(金綠光)을 시조(始祖)로 한다. 그는 1236년(고려 고종 23) 몽고군이 침입해 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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