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신천 강(康)씨 시조 : 강호경, 신천강씨 유래

뿌리 찾는 심마니 2025. 2. 21. 07:19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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신천강(康)씨 시조 : 강호경, 신천강씨 유래

신천 강씨 시조 및 신천강씨 유래

강씨(康氏)의 연원(淵源)은 중국(中國) 경조(京兆: 섬서성 남부 장안현 부근 일대를 차지하는 행정구역) 출신 인 주(周)나라 왕족(王族) 강숙(康 叔)이다.
우리나라 강씨 (康氏)의 연원(淵源)은 강숙의 둘째 아들 강후(康侯) 의 68세손 강호경 (康虎景: 新羅의 聖骨將軍)을 시조(始祖)로 모시고 있다.

강씨 (康氏)의 중시조(中始祖)는 호경 (虎景)의 14세손으로 고려 (高麗) 고종(高宗) 때 호종공신(潭從功臣)에 오르고 신성부원군(信城府院君)에 봉해진 충렬공(忠烈公) 강지연(康之淵)이다. 강씨(康氏)의 본관 (本貫)은 신천(信川)·곡산(谷山)·재령(載寧)을 비롯하여 충원(忠原)·진주(晋州) 강령 (康翎) 등 10여 본(本)이 있는 것으로 전하나 현존(現存)하는 강씨 (康氏)는 신천 (信川)과 곡산(谷山)·재령(載寧) 등 3본이 대종(大宗)을 이룬다.

「신천강씨대동보(信川康氏大同譜)」에 의하면 중시조(中始祖) 지연(之淵)은 고려 명종(明宗: 고려 제19대 왕 재위기간: 1170-1197) 때 문하시중(門下侍中)을 지내고 1231년(고려 고종 18) 몽고군의 개경(開京)침략으 로 이듬해 강화도(江華島)로 천도(遷都: 도읍을 옮김)할 때 왕(王)을 호종(還從)하여 호종공신(墨從功臣)에 올라 신성 (信城: 신천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졌으므로 관향(貫鄕)을 신천(信川)으로 하게 되었고. 제주(濟 州)의 조천서원(朝天書院), 전주(全州) 기린사(麒麟祠). 고창(高敞) 신산사(新山祀)에 배향(配享)되었다.

그 후 지연(之淵)의 7세손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을 파조(派祖)로 하는 곡산파(谷山派)와, 8세손 안릉부원군 (安陵府院君) 득룡(得龍)을 파조(派祖)로 하는 재령파(載 寧派)로 크게 갈리었으며, 조선조(朝鮮朝)에서 한림학사 (翰林學士)와 전라 감사(全羅監司)를 지낸 영암공(瀛巖 公) 영(永)을 신천강씨 (信川康氏)의 제주(濟州) 입도시조 (入島始祖)로 하여 세계를 이어왔다.

신천(信川은) 황해도 중앙무에 위치한 지명으로 단군 신화에 담긴 아사달산(阿斯達山) 당장경(唐藏京)이 있었던 곳으로 한사군(漢四郡)을 거쳐 고구려 시대에는 승산 군(升山郡)이었다. 그 후 고려(高麗) 초(初)에는 신주 (信州)로 불렀고 1413년(태종 13) 지금의 신천(信川)으로 개칭(改稱)되었다.

각 파별(派別)로 대표적인 인물(人物)을 살펴보면 중시조(中始祖) 지연(之淵)의 6세손 윤성(允成)이 고려 충혜왕(忠惠王:고려 제28대왕, 재위기간;1330~1332, 복위 1339~1344) 때 문과(文科)에 급제하고 한림학사(翰林學士)․이부 시랑(吏部侍郞)등을 거쳐 문하찬성사(門下贊成事:문하부의 정2품 벼슬)에 올랐으며, 그의 딸이 이성계(李成桂)의 비(妃)인 신덕왕후(神德王后:방번․방석과 경순공주를 낳았음)가 되어 상산(象山:곡산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해짐으로 후손들이 곡산(谷山)으로 관향(貫鄕)을 삼았다.

한편 재령파(載寧派)의 파조(派祖)인 안정공(安靖公) 득룡(得龍)은 중시조(中始組) 지연(之淵)의 8세손으로 고려 공민왕(恭愍王:고려 제31대왕, 재위기간:1351~1374) 때 삼사우사(三司右使:국가 전곡의 출납과 회계를 맡아보던 정2품 벼슬)를 지내다가 1392년 조선(朝鮮)이 개국(開國)하자 불사이군(不事二君)의 충절(忠節)로 관악산(冠岳山) 의상대(義湘臺)에 올라가 송경(松京:개성)을 향해 통곡하니 이때부터 이곳은 연주대(戀主臺)라 불리웠고, 태조(太祖)가 그의 충절을 가상히 여겨 그를 안릉(安陵:재령의 옛 이름) 부원군(府院君)에 봉하고 안정공(安靖公)이라는 시호(諡號)를 하사했다.

또한 제주 입도시조(入島始祖)인 영암공(瀛巖公) 영(永)은 신덕왕후(神德王后)의 사촌 오라버니로 전라감사(全羅監司)를 지냈으며, 왕자의 난(조선 개국 초 태종의 아들 방원과 방간이 왕위 계승을 둘러싸고 일으킨 두 차례의 난)이 일어나자 피신하여 제주(濟州)에서 일생을 마침으로 제주 강씨(濟州康氏)의 입도시조(入島始祖)가 되었다.

가문을 빛낸 인물로는 고려의 무신(武臣)인 조(兆)가 도통사(都統使:각 도의 군사를 통솔하는 무관직 벼슬)를 지냈으며, 증(拯)은 음보(蔭補)로 벼슬에 등용되어 예종(睿宗:고려 제16대왕, 재위기간:1105~1122) 대 평장사(平章事)를 역임한 후 강령 강씨(康翎康氏)로 분적(分籍)하였다.

조선조(朝鮮朝)에 와서는 상산부원군(象山府院君) 윤성(允成)의 증손(曾孫) 순(純)이 1453년(단종 1) 회령부사(會寧府使)를 거쳐 판의주목사(判義州牧使)를 지낸 뒤 1457년(세조 2) 첨지중추원사(僉知中樞院事)로 사은사(謝恩使)가 되어 명(明)나라에 다녀왔으며, 1467년(세조 12) 이시애(李施愛)의 난이 일어나자 진북장군(鎭北將軍)으로 어유소(魚有沼)와 함께 홍원(洪原)․북청(北靑)․만령(蔓嶺) 등지에서 공을 세워 난이 평정되자 적개일등공신(敵愾一等功臣)으로 신천부원군(信川府院君)에 봉해졌다.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 결과에 의하면 신천강씨는 남한에 총 52,945명이 살고 있는 것으로 나타났다.

https://youtu.be/zIShGYE750Q?si=ykbUHhhFqUCFuit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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