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여 서(徐)씨 문중의 유래와 조형물
오늘은 부여서(徐)씨의 조형물과 문중의 유래를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함께하시죠.
부여서씨
성씨 서(徐)
작품명 백제의 氣象
조각가 구광민
조형물번호 155
먼저 부여서씨 문중이 설치한 조형물을 살펴볼까요.
이 작품은 백제국 시조인 온조왕의 역사성과 6대왕제를 왕손으로 참여하여 종헌관과 후손의 소임을 다하는 부여서씨의 상징을 향로로 표상하여 백제의 기상을 표현하였습니다.
전체적 세면은 삼문중의 웅비와 비상을 조형적으로 표상하였다고 작가는 설명하고 있습니다.
그럼 이제 부여서씨 문중의 유래에 대해 돋보기로 비춰보겠습니다.
부여서씨는 백제국(百濟國) 건국 이후 31대 의자왕(義慈王)때에 이르러 신라와 중국의 당나라 연합군의 침공을 받아 서기 660년 백제국이 망하니 의자왕은 태자인 융(隆)을 비롯 대신 등 88인이 당군에 의하여 당나라에 들어가게 되었습니다. 의자왕은 입당 후 1년이 못되어 세상을 떠나게 되자 중국 북망산(北邙山)에 안장하였죠.
한편 당 고종은 의자왕의 태자인 융(隆)에게 본성인 부여씨(扶餘氏)를 고쳐 서씨(徐氏) 성을 사성(賜姓)하고 웅진(지금의 공주) 도독(都督)을 삼아 백제군(百濟君)에 봉하므로 공(公)은 웅진도총관(熊津都摠管)이 되었다고 전하며 춘추 68세에 중국에서 돌아가시니 서기 682년 12월 24일에 중국 북망(北邙) 청선리(淸善里)에 예장하였습니다.
그리하여 본래의 성(姓)인 부여(扶餘)를 본관으로 삼아 문호가 열리게 되었고, 고려조 후기 병부상서(兵部尙書)를 지내고 태원군(太原君)에 봉해진 서존(徐存)을 1세조로 하여 세계가 이어왔으며 이후 종중(宗中)은 조선조에 이르러 크게 번성하여 3문중 산하 22파로 번성하였습니다.
백제 고도의 부여에서는 백제문화를 빛내던 6대왕(성왕, 위덕왕, 혜왕, 법왕, 무왕, 의자왕) 제(際)가 매년 능산리에서 봉행되고 부여서씨는 헌관으로 참여하여 후손의 소임을 다하고 있습니다(뿌리공원 문중 유래비에서 인용). 2015년 통계청 인구조사에서 부여서씨는 17,145명으로 조사되었습니다.
https://youtu.be/zIShGYE750Q?si=-tnbf60GC9-5DCcD